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대한제국(폭군 고종대왕 일대기) (문단 편집) == 문화 == 폭군판 새마을 운동과 산업의 발전으로 부가 축적되며 자본을 가진 계층이 자발적으로 선도하기 시작했다. 모든 문화 산업의 기반에는 자본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개인의 경우에도 돈이 있어야 여유가 생기고, 그만큼 잉여 활동을 할 수 있다. 작중 조선 민중들이 극도의 빈곤이나 기아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지니 망하더라도 이것저것 시도해 보자고 하는 장면이 나온다. 프랑스 귀족처럼 집안에 화가를 고용해서 조상님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 명문가가 나왔는가 하면, 짝퉁인 줄 모르고 아름다운 서양화를 긁어모으는 졸부들도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문화의 도입과 흡수가 가속도를 타기 시작했다. 현재 유럽 정세가 개판 오 분 전임을 가만하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아시아로 오는 프랑스 예술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번잡하고 요란한 유럽을 떠나 타이티 같은 휴양지에 이민을 온 예술가나 문인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 오페라를 흉내 내는 극단들도 나타나고, 최고의 판소리꾼을 지망하는 이들도 나타나 이전 시대보다 문화 예술 활동에 대한 인식이 나아졌다.[* 사실 조선 후기에도 양반이나 학식 있는 상민 출신의 광대나 판소리꾼들이 아주 없진 않은데, 이들을 더러 '비가비'라 불렀다.] 스포츠에 있어 노동 계층은 축구를 즐기기 시작했고, 만주에서는 경마가 활성화된 듯. 축구나 경마는 군사 훈련이나 군마 양성에도 응용할 수 있기 때문에 군사력 강화에도 도움이 된다. 이형은 기술교류와 문화교류 두 고삐를 모두 잡을 겸해서 자신의 즉위 30주년(1차 회맹에서 17년 후)에 '''만국박람회'''를 개최하겠다고 선포한다. 장소는 전주. 이거 하나 때문에 범아주 조약기구의 모든 국가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차라리 한성이었으면 나았을 텐데, 조선이 개국된 이래 '''풍패지향'''이라 불리는 전주에서 행한 만국박람회가 망해버리면 그건 '''전주가 본관인 대한제국 황실의 망신'''이 되기 때문. 이와 별개로 고종이 전주를 선정한 건 한성의 부동산 시세 문제도 있지만, 경부 축선 중심으로 개발될 대한제국령 조선의 미래를 감안해 명색이 황가의 고향으로서 먹고 살 거리를 마련하고자 내린 결정이다. 각국의 기술과 문화를 전 세계에 공개하되, 어차피 서양 열강에 비하면 뒤떨어질 것은 뻔하니 일반 민중이 거리감을 느끼지 않게 하도록 주의하라는 명은 덤. 결국은 분열 정책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1880년대 되면서 한양은 각국의 문물들이 들어오고 프랑스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전한 유흥문화로 파리와 같은 도시가 되어가는 중이다. 가로등 덕분에 밤에도 시내가 활발하고, 동대문 거래소에는 유구 같은 소국의 1년치 예산이 하루 만에 거래되고, 명동에 건설된 어용 백화점과 할인점에는 세계 각국의 향수들을 비롯한 여러 물자가 풍부하다고 묘사된다. 카페도 도입됐는지 성균관 대학생들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토론한다고 서술이 되었다. 즉위 30년을 맞이해 임진왜란때 불타 없어진 경복궁도 재건하려고 한다. 원 역사에서는 대원군 시기 무리한 재건으로 당백전이라는 희대의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걸 알기에 미루던 건데, 이강의 결혼을 계기로 재건하면서 시대변화에 따라 수도와 전기를 달고, 색목인 며느리를 위해 서양식 별궁을 짓기로 한다. 미영전쟁을 막기 위해 한국으로 달려오던 모건은 궁전 하나 짓는게 이제 와서라니 사치가 뭔지도 모르는 황제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냐고 머리를 부여잡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